소셜 애니멀

데이비드 브룩스

★★★★★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사는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매우 다르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동일한 경험은 마치 기적처럼 보인다. 동일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에 운명이라는 화려한 꽃가루를 뿌려준다.

제럴드 에덜만이 표현했듯이 뇌는 생태계와 비슷하다. 점화(신경세포의 자극), 경향, 반응, 감정 (이것들은 모두 뇌의 각기 다른 부분에 반응하며 인간이라는 유기체를 제어하기 위한 단서를 획득하려고 경쟁한다) 등이 환상적일 정도로 복잡하게 연관되어있는 네트워크이다.

결국 인간은 의사결정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방랑자일 뿐이다.지난 세기동안 사람들은 의사결정이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현상이라고 파악했다. 여러 사실과 환경 요소 및 증거를 모은 다음 어떤 결정이 내려진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의사결정 과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사회적인 풍경 속을 걸어가는 방랑자라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하다. 우리는 수 많은 사람과 온갖 가능성으로 만들어진 환경 속을 걸어가고 있다. 걸어가면서 마음은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가치 판단을 하고, 이것이 쌓여서 목표가 되고, 야망이 되고, 꿈이 되고, 욕망이 된다.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는 열쇠는 감정을 훈련하고, 감정이 올바른 신호를 보내게 하는 것,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독특한 신경망을 가지고 있는데, 신경망은 각자 인생을 살면서 받는 전기적인 자극에 의해 형성되고 강화되며 끊임없이 업데이트 된다. 어떤 회로가 한번 형성되고 나면, 미래에 이 회로가 다시 점화될 가능성이 높다. 신경망은 경험을 구체화해서 담고 있으며, 미래에 수행 할 행동을 안내하기도 한다. 이런 신경망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을 담고있다. 한 사람의 신경망은 이 사람이 하는 행위가 타고 흐르는 일종의 홈같은 것이다. 뇌는 인생을 기록한 기록물이다. 한 사람의 신경망은 이 사람의 습관, 개성, 기호가 물리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당신의 뇌에 있는 신경망이라는 물질로 구체화되는 정신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통합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공간을 설정하고, 이 공간들을 동시에 아우르며, 공유되는 구조를 설정하고, 혼합체에 선택적으로 상상을 가미하며, 상상으로 형성된 혼합체를 다시 또 상상으로써 바라보고, 새로운 구조를 혼합체에 추가하고, 그 혼합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는 것이다” 복수의 신경모형을 혼합하는 행위를 상상이라고 부른다.

정말 위대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기가 위대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다 -Gilbert K. Chesterton>

인간의 뇌는 의식적인 지식을 받아들여 무의식적인 지식으로 변환하도록 되어있다. 학습은 읽기나 대수학같은 낯설고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꾸준하게 흡수해서 자동화하는 과정이다. 자동화과정은 새로운 것들에 작동하는 의식적인 정신을 한층 활성화시킨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이 학습과정을 진보의 원칙이라고 파악했다. “문명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도 수행할 수 있는것의 목록을 늘림으로써 발전한다.”

Reach and Reciprocity : 뻗어나감과 상호성? -스마트 월드 어떤 분야의 핵심 지식에서 출발해서 과감하게 밖으로 나가 새로운것을 배운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새로 확보한 것을 기존의 것과 통합한다. 나갔다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한다.

모든 분야는 독자적인 구조, 독자적인 개요의 틀, 조직화의 원칙, 반복해서 나타나는 모형을 가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 독자적인 패러다임을 갖고있는 것이다. 전문가는 이 구조를 자기것으로 체화해서 갖고 있으며, 그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원리를 암묵지식으로 가지고 있다.

당신은 당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 -Jonah Lehrer

테일러 선생은 헤럴드가 무의식을 넘나들고, 의식적인 과정과 무의식적인 과정을 통섭하는 방식으로 논문을 쓰도록 했다 .처음에는 핵심 지식을 숙지하고, 그 다음에는 그 지식이 머릿속에서 즐겁게 숙성되고, 지식에 질서를 부여하고, 관련된 자료를 한데 녹여 통합하고, 마법과도 같이 통찰이 의식에 튀어나올 때 까지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고, 마침내 떠오른 통찰을 가지고 논문을 완성하게 한 것이다.

Eric Turkheimer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복잡한 행동도 선형적인 인과관계로 나타나는 것은 없다. 청소년 비행과 같은 중요한 결과론적 행위도 수만가지 원인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각자의 원인은 다시 수만가지 잠재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환경적인 영향이 서로를 공동으로 규정한다거나 혹은 그것이 다시 수만가지 유전자의 영향력과 상호작용한다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려면, 다시 수만가지의 수만가지 환경적 복잡성을 해결해야 한다.”

Walter Lippmann

“인간 본성이 필요로 하는 것 보다 우선하는 것, 배고픔이나 사랑이나 즐거움이나 명성, 심지어 목숨 그 자체보다 우선하는 것,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어떤 질서정연한 규율 속에 놓여있다는 확신이다.”

에이미도 그 나이때는 그랬다. 좌절을 인식하는 순간 과도하게 방어적으로 행동했다. 평범한 상황을 위협적인 상황으로 잘못해석했다. 분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느꼈고 자기를 모욕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모욕을 느꼈다. 내면세계에서 스스로 희생자가 되었다. 사실 내면세계는 본인이 실제로 거주하는 외면세계보다 더 위험하다.

마시멜로 실험에서, 자기통제는 숨어있는 열정을 극복하는 철의 의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의식이 무의식적인 과정을 직접 통제 하기에는 힘도 부족하고 인식도 부족하다. 이 실험은 무의식적인 촉발에 관한 것이다. 어떤 순간이건 수많은 작용이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진행된다. 자기통제력과 자기규율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무의식적인 과정을 촉발시키는 습관과 전략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 데는 세가지 기본적인 단계를 거친다. 첫째, 상황을 지각한다. 둘재, 이성의 힘을 사용해서 이렇게 행동할지 저렇게 행동할지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계산한다. 셋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의지의 힘(의지력)을 사용한다.

19세기에는 세번째 단계, 의지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20세기 들어서는 대부분의 인격형성모델이 두번째 단계, 즉 여러 관심사를 계산하는 이성의 사용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성과 의지는 근육과 같다. 어떤경우 근육은 유혹에 저항하고 충동을 통제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근육은 너무도 허약해서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자기규율을 강제하지 못한다. 많은 경우 자기기만이 통제력을 장악하고 만다.

19세기와 20세기 인격형성 모델은 한계가 있다. 의사결정 과정의 첫번째 단계인 지각행위는 어떤 장면을 포착하는 단순한 행위라고 가정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가정이다. 첫번째 단계가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지각은 어떤 풍경이나 장면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다. 생각을 필요로 하는 고도의 기술적인 관점이다. 본다는 것과 평가한다는 것은 전혀다른 과정이지만, 두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기본적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은 스스로 배우거나 주변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자기에게 닥치는 상황을 올바르게 바라본다.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대응에 필요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의식적인 판단과 반응의 전체적인 그물망이 이미 마련되어 있어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위치와 방향을 잡아준다. 이런상태라면 이성과 의미가 한 층 더 쉽게 힘을 발휘한다.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는 모델은, 인격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단 하나가 아님을 강조한다. 인격은 수백만개의 작고 선한 영향력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신비로운 과정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형성된다. 인격형성에는 공동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또한 근본적인 매커니즘에 영향을 미치는 작고 반복적인 행동이 방식을 강화한다. 선한 행동은 특정한 네트워크를 강화한다. ‘우리는 어떤 덕목을 행동을 옮김으로써 그 행동을 획득한다’ 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언은 옳다. ‘안되더라도 될때까지 하라’ - aa슬로건 ‘ 사회 심리학이 주는 가장 영속적인 교훈 가운데 하나는 행동이 종종 태도와 감정보다 먼저 변한다는 것이다.”

/제2의 천성

사소하고 일상적인 규칙은 언제가 자기규율에 관한 것이었다. 만족을 지연시키고, 자기통제 행위를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이었다. 규칙은 학교와 집에서, 심지어 테니스 코트에서 그녀가 처신하는 방식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영향을 미쳤다. 3학년이 되자 에리카는 테니스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를 할때마다 정신적으로 경기에 대비하는 법을 이미 개발해 두고 있었다. 이른바 ‘간접적 자기통제 방침’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녀는 큰일에 올바로 반응하기 위해 작은 것들을 조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선수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공이 금 밖에 떨어졌는지 안에 떨어졌는지 판정하는 선심의 고함소리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공이 라켓을 맞고 어떻게 날아가느냐에 달려 있을 뿐,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지 때문이다. 그녀의 인격은 그 모든것 한 가운데 있지 않았다. 그녀의 재능도 가운데 있지 않았다. 자아와 자아 존중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것의 중심에는 이루어 내야 하는 과제가 있을 뿐이었다. 과제를 한 가운데 둠으로써 에리카는 의식적인 자아를 차분하게 진정시킬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이 안고 있는 여러가지 특성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을 수 있었다. 오로지 경기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수많은 시간동안 반복해서 연습하면서 마음 속에 새긴 특정 모델에 편안하게 기댈 수 있었다. 이렇게 할 때 자아통제력이 탁월하게 발휘되었다. 아무것도 그녀를 흔들지 못했다.

“한 사람의 자발적인 삶을 이루는 전체 드라마의 전개 양상은 이 사람이 주의를 기울여 받아들이는 양에 따라서 달라진다. 주의를 집중하려는 노력은 의지의 본질적인 현상이다.”

놀라운 성공 뒤에는 낭만적이고 신화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살풍경하고 청교도적인 연습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천재성을 평범한 재능과 가르는 핵심적인 요소는 결코 ‘반짝거리는 신의 뜻’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점차 더 나아질 수 있는 능력이다.

단지 연습에 들인 시간이 중요한게 아니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류수준의 업적을 남긴 사람은 즐겁게 연습했다. 반면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사람은 가장 신중하고 자기비판적으로 연습했다. 이런 사람들은 흔히 전체를 가장 작은 요소로 해체한 다음 작은 요소를 계쏙 반복해서 연습했다.

‘모든 기술은 기억의 한 형태이다’ 기억이라는 내적인 구조물을 쌓는데는 힘든 연습과 투쟁이 필요하다. 이런식으로 뇌연구는 구식 노동관을 강화한다. 세부사항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 끈기, 효율성, 분석적 치밀함, 오랜시간 일 할 수 있는 능력

최고의 ceo는 화려한 공상을 쫓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며 부지런하고 단호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자신이 정말로 잘하는 것을 찾아내 그것을 반복적으로 실행한 사람들이었다. 정서적인 안정과 성실함, 즉 신뢰감을 주고 계획을 세우고 단호하게 밀고나가는 특성.

네트워크 속에서 생각하라. 사회는 수많은 네트워크가 겹겹이 쌓인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신뢰로 형성된다. 신뢰는 정서로 둘러싸여 있는 습관적인 호혜성이다 .두사람이 의사소통과 협력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진정으로 기댈 수 있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기 시작할 때, 두 사람 사이의 신뢰는 점점 커진다. 얼마뒤에는 상대방과 협력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무리 똑똑하다 하더라도 정직성, 엄정함, 공정함등의 특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세상이 우러러 볼 정도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정보를 수집하는 경향, 결론을 내리기 전에 다양한 관점을 찾아보는 성향, 문제에 반응하기 전에 그 문제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생각하는 경향, 이용가능한 증거의 수준에 따라서 얼마나 많은 힘을 쏟을지 판단하고 조정하는 경향, 행동을 취하기 전에 그 행동이 낳을 결과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특정상황이 몰고 올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명확하게 계싼하는 경향. 미요한 차이를 추구하고 절대론을 피하는 경향.’

“나는 오로지 그림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모든것은 시각적이다.” “당신은 감정을 사용해야 한다. 탄소 원자는 무엇을 하고싶은 ‘마음’ 일까?”

지혜는 특정한 사실을 안다거나 어떤 분야의 지식을 소유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지식을 어떻게 다룰지 아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자신감이 있지만 지나쳐서는 안 되고, 모험을 무릅쓰지만 충분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 반증에 기꺼이 맞서며, 이미 알려진 것 너머의 광대한 공간을 느낌으로 느껴야 한다.

뇌의 주된 업무는 이런 모델을 만드는 것이라고 몬태규는 주장한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 예측과 관련된 작은 모형을 뇌에서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 만일 내가 손을 여기에 놓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세운 모델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정확하게 맞물린다면 상당히 달콤하고 긍정적인 느낌을 경험한다. 그렇지 않은 사오항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면 뇌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학습하고 문제가 되는 모델을 조정한다.

사람이 일상생활을 해날갈 때 정신은 자기안에 저장된 여러가지 유효한 모델을 바탕으로 해서 기대가능한 모형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내면적인 모형과 외부세상 사이에는 종종 긴장이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개념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포착하거나 어떤 과제에 통달할 때, 쾌감이 요동친다. 조화로운 상황이 이어진다고 쾌감이 생기는게 아니다. 뇌에 쾌감이 요동칠때는 긴장감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행복한 인생은 반복적으로 순환되는 리듬을 갖고있다. 말하자면, 어려움에서 조화로움으로 다시 어려움에서 조화로움으로 변하는 리듬이다. 친밀감을 추구하는 욕망, 내면에 모형과 외면의 모형이 일치하는 순간을 추구하는 욕망이 행복한 인생을 만든다.

친밀감에 대한 갈망은, 자신이 자연 및 신과 하나로 합쳐져 있다고 느끼는 투명한 순간, 영혼이 고양되어 우주와 자신이 하나가 된다고 느끼는 순간에 가장 심원하다.

무의식. 그 유연한 도구.

먼저, 의식적인 과정은 무의식적인 과정을 전제한다. 무의식적인 생각을 제외하고 이성적인 생각을 논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2차적 인식은 인풋과 목표, 방향성 신호를 1차적 인식에서 받는다. 사람이 제대로 생활하려면 이 두체계가 서로 잘 엮여야 한다.

1차적 인식 -> 방대한 내현적 기억체계. 2차적 인식 -> 주어진 순간에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정보의 조각인 작업기억체계

인식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식론적인 겸손은 우리가 알 수 있는게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인식론적인 겸손은 삶에 대한 태도이다. 이 태도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깨우침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것은 대부분 의식적인 관찰이나 조사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자신이야말로 가장 신비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온전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환경역시 제대로 알 수 없다. 어떤 사건도 역사적인 흐름 ( 그 사건 이전에 일어났던 무한대의 사건들,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 사건과 관련된 주변환경 ) 속에 그 사건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인식론적인 겸손은 실행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은 지혜란 우리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이런 깨달음을 가질 때 우리가 가진 제한된 지식을 부분적이나마 보완할 수 있는 습관, 조정, 절차등을 설계할 수 있다.

겸손한 기질은, 단 하나의 방법론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지식은 다양한 역학을 통합하고 합성해야 얻을 수 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분석과 조사를 통해 얻은 지식들)

이 지식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 속에서 조화와 리듬을 찾아내기 위해 정밀하게 관찰하고, 느슨하게 상상하며, 비슷한 것과 바슷하지 않은 것을 비교하면서 오랜시간에 걸쳐서 만들어 진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의 패러다임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대부분 오랜시간에 걸쳐 힘들고 끈질기게 헤매는 과정에서 축적된 것이다.

인간역시 물고기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지식을 축적하는데 솜씨가 있다. 인간은 9만 세대를 이어오면서 지형을 탐험하고, 온갖 위험과 온갖 기회를 감지했다. 어던 사람은 새로운 지형을 탐험하거나 처음가는 나라에 발을 디딜 때,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모든것이 차례대로 그 사람의 눈에 포착된다.

주변의 모든 것을 자기것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성 receptiveness 은 본인이 물리적으로 어떤 장소에 있을때 가능하다. 그 장소에 관한 글을 읽어서는 소용없다. 바로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풍경속에 녹아들어야 한다. 실제로 어떤 장소에 가 있지 않으면 그곳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어떤것을 연구하려 하지 말고 그것에 익숙해져라. 만일 당신이 어떤 장면 속에 있다면, 당신은 특정한 상황으로 던져진 상태이다. 수천가지 감각이 당신을 덮친다.

사람의 정신은 자기가 받아들이는 세부적인 모든 감각에 대해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고, 새로운 이론을 새로운 데이터와 함께 정리하길 원한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증오하며 서둘러 판단을 내리려한다.

그러나 끈기있게 헤매는 사람은 불확실성을 견딘다. 현명한 방랑자는 ‘사실과 이성을 초조하게 쫓지않고 불확실성과 수수께끼와 의심’ (존 카츠)속에서 견디는 바로 그 능력으로 참고 기다린다.

풍경이 복잡할수록 방랑자는 더 많은 끈기를 발휘한다. 풍경이 혼란스러울수록 방랑자의 조망은 더욱 관대해진다. 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모자란지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무지에 맞설때 자기가 얼마나 허약한지도 알고있다. 또 자신의 정신이 풍경에서 처음 접수하는 아주 작은 데이터로 모든것을 설명하는 허술한 이론을 만들어낼 것 임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신이 가장 최근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이 경우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할 것임을 알고있다. 그는 또 이미 마음속에 인생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고정관념을 갖고 있고 그 관념으로 풍경을 바라본다. 때문에 그는 자기가 바라보는 것을 고정관념에 맞추려 할것을 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늘 경계한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인다. 조심스럽게 일반화하고, 새로운 감각을 분석하고 다시 그 감각에 초점을 맞춘다. 계속해서 여기저기 방랑하며 외부 정보를 흡수하고, 이 정보를 내면 깊숙한 곳에 재워둔다.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다. 한쪽 풍경을 바라보고 나서 다른 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천천히 느낀다. 새로운 풍경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의 독특한 행동을 마음에 새기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이 걷는 방식대로 걷고 웃는대로 웃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여러 모형, 그들로서는 언젠가부터 의식도 하지 않게 된 모형을 본다. 그의 정신은 이 사람들의 삶을 이루는 외부적인 것(물질) 과 내면에 있다고 추론하는 것 (희망, 목표)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간다.

한편 1차적인 인식은 온갖 자료를 한데 섞으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유사성과 리듬을 찾아서 끊임없이 쏘다닌다. 그러면 이 새로운 풍경에서 어떤 느낌이 생긴다. 저 빛은 어떻게 떨어질까? 사람들은 서로 어떻게 인사를 나눌까? 인생의 속도는 무엇일까? 무의식이 밝히고자 하는 것은 개인적인 사항만이 아니다. 개인들 사이의 모형 역시 무의식의 탐구대상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밀접하게 일을 할까? 물에 사는 물고기를 묘사하는게 전부가 아니라 물고기가 사는 물의 특성도 함께 묘사하는게 중요하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 평온한 순간이 온다. 이때 개별적인 관찰 내용이 통일성이 있는 전체로 녹아든다. 방랑자는 사람들이 어떻게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지 예측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마음 속에 지도를 갖게 된다. 그의 뇌에 찍힌 풍경의 윤곽은 새로운 곳의 실제 윤곽과 조화를 이룬다. 때로 동조성을 서서히 나타난다. 때로는 영감이 불꽃처럼 피어올라 지도의 초점이 갑자기 선명하게 맞춰진다. 이런 순간에 정신은 이전의 모든 자료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측정할 수도 없을 만큼 복잡하던 것이 이제는 아름다울 정도로 단순하게 보인다.

마침내 그 순간이 온다. 메마르고 지루하고 절망스러운 시간을 견뎌 낸 뒤에야 비로소 모든것이 촉촉하고 간결해지는 그 순간이 온다. 그리스인은 그 순간을 metis라고 불렀다. 1차적인식과 2차적인식 사이의 대화에서 비롯되는 지혜의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