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

제프 호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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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뇌,생각하는 기계/제프 호킨스

인간은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굳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야기를 소리내지 않고 읽을 수 있으며,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반면에 내가 말 없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는 당신은 내가 그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 알 수 없으며, 그 이야기를 적은 언어를 내가 아는지조차 알 수 없다. 나중에 당신은 내가 이해를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할 수 있지만, 내 이해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을 할 때가 아니라 그 아야기를 읽을 때 이루어진 것이다.

이해는 뇌가 사건들을 기억하는 방식과 기억들을 이용하여 예측을 하는 방식이라는 내면의 과정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대다수 신경망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지닌 것과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 행동을 ‘해답’. ‘패턴’. ‘출력’ 등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인공 지능과 신경망은 둘 다 지능이 프로그램이나 신경망이 입력을 처리하여 내놓는 행동 속에 담겨 있다고 가정한다.하지만 지능은 단지 지적으로 행동하거나 활동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행동은 지능의 한 표현 형태이지, 지능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는 핵심 특징도 지능을 규정하는 주요 요소도 아니다. 잠시만 상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냥 어두운 곳에 누워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일만 하고 있어도 당신은 지적일 수 있다.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 무시한 채,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는 지능을 이해하고 지적 기계룰 만드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다.신피질은 신경 세포들, 즉 뉴런들로 가득하다. 뉴런들이 아주 빽빽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부 해부학자들은 인간의 신피질에 약 300억개의 뉴런이 있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거나 적다고 해도 놀랄 필요는 없다.그 300억 개의 세포들이 바로 당신이다. 그것들은 당신의 기억, 지식, 솜씨, 축적된 인생 경험을 거의 전부 다 담고 있다. 25년 동안 뇌를 생각해왔지만, 나는 지금도 그 사실에 놀라곤 한다. 세포들로 이루어진 얇은 판이 보고, 느끼고,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한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여름에 느끼는 더위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꿈은 이 세포들이 어찌어찌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프랜시스 크릭은 뇌를 다룬 <놀라운 가설="">이라는 책을 썼다. 놀라운 가설이란 그저 정신이 뇌에 있는 세포들의 창조물이라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즉 마법도, 특수한 첨가물도 없으며, 오로지 현란한 춤을 추는 뉴련들과 정보들만 있다는 것이다.이 깨달음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당신도 실감하기를 바란다. 세포들의 집단과 의식 경험 사이에는 엄청난 철학적 심연이 있는 듯하지만, 정신과 뇌는 하나이자 같은 것이다. 자신의 손에 닿는 촉감을 느끼고 자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속고 있는’것이 아닐까? 세계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 세계는 정말로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 아주 가까운 절대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뇌는 그 절대 세계를 직접적으로는 알 수 없다.


뇌는 감각 집합을 통해 세계를 알며, 각 감각은 절대 세계의 일부만을 검출할 수 있다. 뇌가 문제의 해답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뇌는 기억에서 해답을 불러낼 뿐이다. 본래 그 해답은 오래전에 기억에 저장되어 있었다. 기억에서 무언가를 불러내는 데에는 고작 몇 단계면 된다. 느린 뉴런들이라도 그정도는 충분히 빨리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뉴런들 자체가 바로 기억을 이루고 있다. 피질은 전체가 하나의 기억 체계이다. 피질은 결코 컴퓨터가 아니다. 당신은 일어난 모든 일을 한꺼번에 동시다발로 말할 수 없다. 아무리 말을 빨리 하든, 내가 아무리 귀를 기울이든 간에 말이다. 이야기의 한 대목을 끝낸 뒤에야 다음 대목으로 넘어갈 수 있다. 말이 순서대로 나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글이든 말이든 영상 언어든 간에, 모든 이야기는 순서대로 전달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이야기가 당신의 머릿속에 순서대로 저장되며, 같은 순서로만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야기 전체를 한꺼번에 기억해낼 수 없다. 사실 연속된 형태가 아닌 어떤 복잡한 사건이나 생각을 기억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뇌는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고스란히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벽한 신뢰도를 유지하면서 기억하거나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피질과 뉴런들이 엉성하거나 오류를 쉽게 저지르기 때문이 아니라, 뇌가 세세한 사항들에 개의치 않고 중요한 관계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피질 전체에 걸쳐, 모든 영역에서 비슷한 형태의 추상화가 일어난다고 믿는다. 이것은 신피질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기억은 당시의 세부 사항들이 아니라, 관계의 핵심을 포착하는 형태로 저장된다. 무언가를 보거나 만지거나 들을 때, 피질은 고도로 구체적인 세세한 입력을 받아서, 그것을 불변 형태로 전환시킨다. 기억에 저장되는 것은 바로 이 불변 형태이며, 각각의 새로운 입력 패턴은 이 불변 형태와 비교된다.

예측이 아주 만연해 있으므로, 우리가 ‘지각하는’것 즉 우리에게 보이는 세계는 감각들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감지한 것과 뇌의 기억에서 파생된 예측을 조합한 것이다.

올바른 예측은 이해를 낳는다. 올바르지 못한 예측은 혼란을 낳고 즉시 주목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느 감각 할 것 없이 병렬적으로 끊임없이 낮은 수준의 예측들을 하고 있다.

예측은 뇌가 하는 일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예측은 신피질의 주된 기능이며, 지능의 토대이다.

사람들이 말을 할 때면, 맥락을 벗어나면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흔히 나타난다. 하지만 한 문장에서 모호한 단어가 들렸다고 해도, 당신은 그 모호한 단어를 붙들고 씨름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 단어를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단어들을 손으로 썼을 때 맥락을 벗어나면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 흔하지만, 완성된 문장 속에서 보면 쉽게 읽을 수 있다. 대개 당신은 자신이 모호하거나 불완전한 정보를 서열 기억을 동원해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당신은 들리리라고 예상한 것을 들으며, 보이리라고 예상한 것을 본다. 단세포 생물이 지적일까? 인간의 지능이라는 일상적인 개념을 뜻한다면, 대답은 아이오이다. 하지만 이 동물은 기억과 예측을 이요하여 더 성공적으로 번식을 하는 종들의 연속체상에서 맨 끝자락에 놓여 있으며, 학술적인 기준으로 볼 때 답은 예이다. 요점은 어느 종은 지능이 있고 어느 종은 지능이 없다고 꼬리표를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기억과 예측을 이용한다. 단지 사용방법과 정교함이 하나의 연속체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식물들도 기억과 예측을 동원하여 세계의 구조를 이용한다. 나무는 뿌리를 흙속으로 뻗을 때, 가지와 잎을 하늘로 뻗을 때 예측을 한다. 나무는 조상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물과 양분이 어디에 있을지 예측을 한다. 물론 나무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나무의 행동은 자동적이다. 하지만 나무는 단세포 생물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의 구조를 이용하고 있다. 모든 식물 종은 세계의 구조중 조금씩 다른 부분들을 이용하는 나름대로의 행동 집합을 갖고 있다.

사실 고도로 창조적인 예술 작품들은 우리의 예측에 어긋나기 때문에 인정을 받는다. 인물, 줄거리, 촬영 기법 등에서 익숙한 양식을 파괴하는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즐거워한다. 진부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림, 음악,시,소설 등 모든 창조 예술들은 관습을 타파하고 대중의 예상을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예술 작품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모순된 긴장이다. 우리는 예쑬이 친숙해지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독특하고 예상을 벗어나기를 바란다. 너무 친숙해지면 모방이나 키치가 된다. 너무 독특하면 거슬리고 이해하기 어렵다. 최상의 작품은 어떤 예상되는 패턴을 타파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 예측, 따라서 우리의 재능은 우리의 경험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이 특정한 패턴에 점점 더 많이 노출될수록, 그 패턴에 대한 기억은 더 하위 계층에서 재형성된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고차원의 추상적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상위 계층에서 학습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전문 지식의 본질이다. 나는 문제를 풀 때 유용한 유추를 더 잘 찾아낼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 풀고자 하는 문제에 해답이 있다는 것을 집심으로 믿어야 한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포기한다. 해답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오랜 기간 끈기 있게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둘째, 정신이 방황을 하도록 허용할 필요가 있다. 뇌에 해답을 발견할 시간과 공간을 주어야 한다. 어떤 문제의 해답을 찾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세계에 있는 패턴이나 당신이 풀고있는 문제와 유사한 피질 내에 저장된 패턴을 찾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도무지 풀리지 않을 때, 기억-예측 모형은 과거의 경험에서 유추를 떠올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그 문제를 계속 들여다보기만 한다면, 그다지 진척이 없을 것이다. 문제의 한 부분을 떼어내 다른 방식으로 재배열해보라. 말 그대로도 그렇고 상징적으로도 그렇다. 단어 만들기 놀이를 할 때, 나는 글자가 적힌 조각들을 끊임없이 재배열한다. 우연히 새 단어가 나오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각기 다른 글자 조합이 단어나 해답으로 이어질 단어 부분을 머릿속에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면, 잠시 제쳐두어라. 딴 일을 하라. 그런 다음 문제를 새로운 형식으로 고쳐놓고 다시 풀어보라. 끈기를 갖고 계속하다 보면, 조만간 머릿속에 무언가 반짝할 것이다. 며칠 혹은 몇 주가 걸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런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과거나 현재의 경험 어딘가에서 비슷한 상황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이다. 성공하려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하지만, 한편으로 피질이 비슷한 기억을 찾을 기회를 갖게끔 다른 것들도 생각해야 한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진짜이며, 나누도 진짜이고, 내 고양이도 진짜이고, 당신이 처한 사회적 상황도 진짜이다. 하지만 당신의 세계 이해와 그에 따른 당신의 반응은 내부 모형을 통해 나온 예측에 토대를 둔다. 매순간 당신은 세계의 극히 일부만을 직접 감지 할 수 있다. 그 일부는 어떤 기억을 불러낼지 규정하지만, 그 자체로는 당신이 현재 지각하는 전체를 구성하기에 부족하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사무실에서 자판을 두드리다가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어머니가 와 계시다는 것을 알며, 실제로 어머니의 모습을 본 것도 목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지만, 어머니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고 상상한다. 감각 입력 중에 내 어머니와 구체적으로 연관된 것은 전혀 없었다. 과거의 경험에서 유추하여 어머니가 여기 있다고 예측하는 것은 내 세계 기억 모형이다. 당신이 지각하는 것은 대부분 감각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기억 모형을 통해 생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이해가 경이감과 신비감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이 삶에서 향기와 색채를 빨아내는 양, 과학적 이해가 늘어날수록 경이로움은 줄어든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세이건은 옳았다. 이해가 늘어날수록 우리가 우주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점점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동시네 우주가 더욱더 다채롭고 신비로워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무한한 우주에서 살아 있고, 인식하고, 지적이고, 창조적인 티끌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 작은 우주의 중심에 놓인 편평하고 좁은 지구에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 우리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한다고 해서 우주, 우리 삶, 우리 미래의 경이와 신비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 지식을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지적 기계를 만들고,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하는 데 이용한수록 우리의 경이로움은 더 깊어져만 간다.